[데스크 칼럼] 권한을 내려놓는 것, 그게 개혁이다

입력 2023-04-09 18:03   수정 2023-04-10 00:15

손에 쥔 권한을 내려놓는다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기업을 쩔쩔매게 하는 규제 권한을 가진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권한이 해당 조직의 ‘존재의 이유’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보기 드문’ 일이 최근 있었다. 주인공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콘텐츠를 하나하나 살펴본 뒤 ‘청소년 관람불가’ 등의 판정을 내리는 조직이다. “영등위 결정에 따라 관객 몇백만 명이 들고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진 곳이다.

이런 영등위가 얼마 전 “OTT 콘텐츠를 사전 심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OTT업체가 스스로 등급을 매기고, 영등위는 사후 심사·제재하는 법을 제정해 다음달부터 시행하기로 한 것. ‘두 팔’(영화와 OTT) 중 하나를 자른다는 얘기였다.
OTT 심의권 내려놓은 영등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2016년 넷플릭스를 시작으로 디즈니플러스 티빙 웨이브 등이 뛰어들면서 관련 콘텐츠가 홍수처럼 쏟아졌기 때문이다. 2015년 4339건이었던 등급 분류 건수는 2021년 1만6167건으로 6년 만에 3.7배 불었다. 2주 안에 끝나던 심의가 1개월까지 늘어나니, 곳곳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심의할 건덕지도 없는 BTS 콘서트 영상을 공연 다음 날 영등위에 제출해도 ‘트래픽 잼’ 탓에 몇 날 며칠을 기다려야 하니, 목놓아 기다리던 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속이 타들어가긴 OTT업체도 마찬가지였다. 사전심의 때문에 방영 타이밍을 놓치는 콘텐츠가 속출해서다. 영국 왕실의 비밀을 폭로한 해리 왕자 부부의 인터뷰가 담긴 다큐멘터리 ‘해리와 메건’이 그랬다. 작년 12월 8일 넷플릭스가 전 세계 동시 공개하자마자 엄청난 화제가 됐지만, 한국 시청자들은 ‘한물간 이슈’가 된 올 1월 4일에야 볼 수 있었다.

언제까지 이런 ‘비정상’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터. 해법은 둘 중 하나였다. 영등위 인력을 대폭 늘려 사전심의제도를 유지하거나, 민간에 심의권을 내주거나. 우리가 알던 정부는 이럴 때마다 권한을 틀어쥐는 쪽을 택했다. “민간에 맡기면 ‘19금’ 콘텐츠를 ‘15금’으로 낮출 게 뻔하다”는 이유를 대면서.
규제부처 권한이양 시금석 될까
이번에는 달랐다. 여러 이유가 겹쳤다. OTT업체들의 강력한 요청, 미국 등 주요국이 자율심의하는 점, 기획재정부가 공공기관 증원을 잘 허용하지 않는 점 등이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쓸데없는 규제는 없애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와 “시대 변화에 맞게 변해야 산다”는 영등위의 자각이 더해졌다.

공공기관이 핵심 업무를 민간에 내주는 보기 드문 장면은 이렇게 완성됐다. 권한 이양의 최대 수혜자는 우리 국민이다. 다른 나라보다 한 달 늦게 봤던 콘텐츠를 다음달부터 동시에 볼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개혁에 부작용이 없을 순 없다. 노출 수위가 높은 영상을 OTT업체가 ‘15세 이상 관람가’로 매겼다가 “섣부른 규제 완화”란 질책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가서야 되겠는가. 규제 완화의 이익이 부작용을 압도한다면 밀어붙이는 게 정답이다. 이런 작은 개혁이 줄을 잇고, 그 효용을 국민이 느낄 때 세상은 변하기 시작한다. 그래야 온갖 이유를 들이밀며 틈만 나면 권한을 늘리려는 ‘규제 부처’들도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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